취향과 수준에 따른 4가지 분류

by SL

사람의 능력을 취향과 깊이라는 두 개의 차원으로 단순화해보았다.

위 그림에서 각각의 사각형이 한 사람을 나타낸다. 사각형의 길이는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수준, 즉 내공을 뜻한다. 쉽게 말해 A와 C가 1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이라면, B와 D는 이제 갓 뛰어든 햇병아리다.

원 중심으로부터의 방향은 그 사람의 분야/취향/스타일을 나타낸다. A와 B가 한 그룹, C와 D가 또 다른 한 그룹에 속하는데, 프로그래머 vs 디자이너, 윈도우 개발자 vs 리눅스 개발자, vi 사용자 vs emacs 사용자 등등 결론이 나기 어려운 논쟁을 벌이는 어떤 관계라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자, 간단하게 4가지로 분류했으니 이제는 각각의 사람들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자.

우선 A와 B (혹은 C와 D)가 만나면 이상적인 스승-제자 관계가 된다. B는 A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으며, 추구하는 방향이 비슷하므로 A의 가르침이나 충고를 쉽게 받아들인다.

그럼 A와 C가 만나면? 즉, 서로 추구하는 방향은 다르지만 나름의 일가를 이룬 두 대가가 만난다면? 대화를 통해 공통된 결론에 이르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히 설득(제압??)하는 일은 보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심도있고 건설적인 토론은 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지켜보는 사람들이 보고 배울 게 많은 그런 논쟁 말이다.

B와 D 사이에서는 도토리 키재기 식 논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둘의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답답한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문제는 A와 D, 또는 B와 C가 만났을 때이다. 왜냐하면, 한쪽이 다른 한쪽의 (상대적인) 우수함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에서는 대등한 수준의 논쟁이 가능하지도 않고, 한쪽이 다른 쪽을 이끌어주는 관계가 되기도 어렵다. A 입장에서 D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테고, D에게 A는 답답하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건 아마도 한참 동안이나 힘든 대화를 하고 난 이후일 것이다.

극단적인 단순화 같지만, 여태 내가 본 많은 소모적인 논쟁은 A와 D 같은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상태에서 ‘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냐’, ‘왜 너의 “스타일”을 내게 강요하느냐’며 원론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상황은 더욱 암울해진다.

나는 비합리적인 권위는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권위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주제가 충분히 명확하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사람마다 전문성의 정도가 다르며 그 차이만큼 그 사람이 더 혹은 덜 존중받는 건 분명 납득할 만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너와 나는 달라” 라는 한 마디로 더 이상의 (건설적일 수도 있었던) 논의를 거부하는 태도에 대한 당혹감 때문이다. 다양성이나 차이는 존중받아야겠지만, 그걸 핑계로 소통을 거부하는 자세로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지 않을까?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나와 상대방의 권위/내공은 얼마인지 계산해서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대화가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순간 지금이 위의 네 경우 중 어디에 속하는지 따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적절한 대응 전략을 찾는다면 대화를 보다 건설적으로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