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이집트 여행: 첫째날

by SL

오스트리아 빈의 꿈같았던 밤을 뒤로하고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보다는 저녁에 가까운 오후였다. 달러로 비자를 사고, 이집트 화폐로 환전을 하려는데, 이집트항공 승무원 복장을 한 두 여인이 새치기를 시도했다. 새치기가 비일비재하다는 이집트에 왔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환전소 직원이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사람들이 먼저 왔으니 일처리를 해주겠다며 그녀들을 밀어냈다. 멋쟁이.

두 번째 난관은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는 일이었다. 이집트 여행 가이드에서는 꼭 공항에서 적정 요금을 확인한 후 운전사와 미리 가격을 협상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묵은 노보텔은 셔틀버스가 있어서 택시기사와의 실랑이는 다음으로 미뤄졌다.

시내가 아니라 공항에서 5분밖에 안 걸리는 노보텔을 숙소로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 4시에 비행기를 타고 아스완을 거쳐 아부심벨로 가는 일정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전체 9일 중 이집트에 머무는 것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밖에 안 된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5일 동안 카이로 기자 피라미드, 아부심벨, 룩소르를 모두 보기에는 일정이 안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결정했다.

‘돈으로 시간을 사자’

이집트항공 국내선을 타고 하루만에 카이로 – 아부심벨 – 아스완을 해치우는 대가로 40만원을 써버렸다. (참고로, 한국 – 이집트 국제선 가격이 대략 150만 원 선이었다.) 아무튼 그건 내일 이야기니까 내일 하기로 하자.

한국에서 준비할 때부터 카이로에서 첫날 저녁에 무엇을 할지는 큰 고민거리였다. 원래는 디너 크루즈를 타고 나일강에서 이집트의 정취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니 다들 별로라는 게 아닌가. 결국 포기하고 대신 기자의 피라미드에서 한다는 ‘빛과 소리의 쇼’를 보기로 했다.

호텔 로비에 택시 중개를 하는 사람과 얘기해서 차를 대절했다. 이집트 화폐로 400EL, 우리돈으로 8만 원을 내면 하루 동안 우리가 원하는 곳에 다 데려다 주는 조건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이미 저녁이라 기자만 다녀와도 밤이 되는, 한 마디로 완전 바가지 가격이었으나 우리는 상황과 시세를 몰랐기에 그러마고 했다.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이라는데, 여행에서는 준비가 미흡하면 지갑이 가벼워진다.

호텔에서 기자까지는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열심히 운전하는 기사를 앞에 두고 친구와 이집트의 무지막지한 교통 문화를 주제로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그 청년은 착한 인상에 운전도 점잖게 했으니 가는 도중에에 이상한 기념품 가게에 우리를 쑤셔넣어서 물건을 팔려고 한 괘씸한 시도는 봐주기로 한다. 하마터면 그것 때문에 피라미드 레이저 쇼 시간을 못 맞출 뻔했지만 나는 관대하니까.

기자의 ‘빛과 소리의 쇼’는 대략 한 시간 동안 기자에 있는 세 피라미드와 그 앞의 스핑크스에 레이저를 쏘면서 이집트의 신화와 역사를 나레이션 한다. 나는 독일어 쇼 시간에 들어가서 라디오 기계로 영어 방송을 들었는데, 어차피 못 알아듣는 건 매한가지라 그냥 눈으로만 봤다. 그래서 내용은 모르겠고, 기억나는 건 인터넷에서 본 멋있는 사진과 실제 모습간의 괴리, 그리고 꽤 쌀쌀했던 이집트의 저녁 날씨 뿐이다.

그냥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디너 크루즈에 가서 실망하느냐, 피라미드 쇼를 보고 실망하느냐 중 하나밖에 없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입구 앞 KFC에서 햄버거 세트를 샀다. 호텔에 돌아와 햄버거를 먹고 나니 이미 10시가 다 됐다. 내일은 새벽 2시에는 일어나서 다시 공항으로 가야 한다. 비행기에서 자면 되니까 4시간밖에 못 자는 건 상관없는데, 과연 내가 꼭두새벽에 일어날 수 있을까? 불안감 속에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