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사회 문제에 과학의 잣대를 갖다대면?

by SL

이전에 소개한 리처드 뮬러의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책의 컨셉은 정책 결정권자가 알아야 하는 과학이다. 정치인이 갖춰야 할 과학 소양은 객관적 지식에서부터 합리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다고 생각하는데, 그 책은 중간중간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언급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과학 지식의 소개와 브리핑이 주를 이룬다. 반면, 이번에 읽은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는 대놓고 과학의 개념과 관점, 기준을 정치/사회/문화 이슈에 들이민다. 왜냐하면 과학이란 물리/화학/생물 분야의 단순한 지식 총합이 아니라, 인류가 개발한 “가장 합리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과학이 만능이라는 자만이 아니라, 그 한계를 성찰하는 겸손까지 포함되어 있다.

4개 파트 중 가장 먼저 나오는 정치면을 보자. “뒤엠-콰인 명제”나 “관찰의 이론의존성” 등을 설명하면서, 실제로 관찰된 몇 가지 반례에도 불구하고 이론이 거부되지 않았던 과학사의 장면을 보여준다. 뉴턴 이론은 수성의 근일점 이동 문제를 설명하지 못했지만, 이를 제대로 설명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올 때까지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이를 보고 ‘아, 과학이 귀납적인 방법론에만 의존하는 건 아니구나’라는 배움만 얻고 그친다면, 일반 과학역사책과 다를 게 없다. 이 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과학사의 “상식”을 사회 현상에 갖다대는 것이다. 가령, BBK라는 ‘반례’에도 불구하고 주어없는 그분이라는 ‘이론’은 왜 무너지지 않았는지를 위의 “뒤엠-콰인” 명제로 설명한다. 또, BBK 사건은 물리 현상으로 따지면 엔트로피가 낮아진 사건이라서 과학자라면 응당 외부 시스템이 개입한 결과로 보고 원인을 찾으려 했을 텐데, 검찰은 그러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이렇게 과학의 잣대를 과학 밖으로 끌어냈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저자는 미국 소고기 협상 문제를 게임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근데 이건 원래 게임이론을 써먹는 분야다) 과학 이론의 아름다움을 TV 드라마의 스토리라인과 비교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주와 풍수지리에 있어 과학의 여지가 없는지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래도 오해는 말자. 저자는 사이비과학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과학적 사고의 유연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풍수의 영향이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과학자의 자세는 그 영향이 있다면 어느 정도일 것이며 없다면 어느 정도 없는지를 정량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175p

하지만, 과학과 문화 컨텐츠의 관계에 대한 의견 중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도 있다. 78페이지의 “상상력이 지식보다 중요하다”에 나오는 <니모를 찾아서> 사례를 보면, 과학자의 힘을 빌려 해양 생물의 실제 모습을 애니메이션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제목과는 반대되는 내용이 아닌가? 게다가, 이런 철저한 사실성이 애니메이션의 완성도를 높이기는 하겠지만, 재미나 흥행에 얼마나 중요할지도 미지수다. (내가 너무 상업성에 물들었나?)

영화 『신기전』에 대한 자문 이야기도 비슷하다. 조선시대의 로켓포 발명을 다루는 영화에서 투사체의 운동 원리를 깨닫는 과학적 과정이 나오면 물론 좋겠지만, 그것과 영화의 재미가 얼마나 큰 관련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음에야 무협영화가 되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과학 이론에서 요구되는 특징을 영화 스토리라인에 적용하는 것은 무척 좋은 통찰이라고 생각하지만, 스토리가 과학적인 내용을 다루는 게 필수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는 보통 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얘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정리

현직 물리학자인 저자의 신선한 시도와 통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책이다. 그동안 학교에서 직장에서 배운 지식을 그 도메인에서나 써먹지 다른 데에는 응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중간중간 물리 설명이 좀 어렵기는 하지만 책의 주요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일상 생활과 사회 문제에 적용하고 싶었으나 막막했던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궁금증

흔히들 말한다. ‘과학이 다가 아니다’, ‘이건 과학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다.’ 나 또한 정량화하기 어려운 문제에 있어서 과학이 한계가 있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과학을 빼면, 그 문제를 다를 수 있는 다른 방법론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예술은 뺀, “학문”을 얘기하는 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읽기

노란 형광펜

  •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아름다운 과학 이론과 TV 드라마의 잘 짜인 스토리라인이 무척이나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점은 과학 체계나 이론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가장 합리적이고 믿을 만한 구조로 짜인, 자연과 인간에 관한 대서사시라는 점을 인정하고 나면 아주 싱거운 결론일지도 모른다. (중략)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던 두 대상이 실제 매우 유사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깨닫고 나면 각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모를 쉽게 알 수 있다. (중략) 바둑의 고수는 정석을 몰라도 그 국면에서 정석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작가는 과학을 몰라도 자신의 스토리를 과학적으로 구성한다., 86 ~ 87p
  • 상식은 보편성과 관계가 있다. 기본적인 상식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상식을 깰 때에는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줘야 한다., 131p
  • 과학이란 무슨 공식이나 단편적인 지식들의 총합만을 말하는 도구가 아니다.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근대화와 계몽의 시대를 겪지 못한 탓에 우리는 이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일상 생활 속에서 적용하고 체화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도 목소리 큰 사람이 어디서나 이기게 되어 있다., 13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