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벗고 일하면 안 되나요: 워드프레스를 만든 업무 문화

by SL

최근에 원격 근무에 대한 로망을 품게 됐다. #book Remote: Office Not Required – 중요한 건 비동기(asynchronous)에 나오는 말처럼, 일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갔다. 검색해보니 Remote라는 책의 독후감 형식으로 여러 의견이 있었다.

많이들 꼽는 문제가 직원과 회사 사이의 신뢰, 업무 생산성 위주의 평가 시스템,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만약 내가 회사를 만들었고, 알고 있는 최고의 동료를 불러모았다고 치자. 그럼 앞의 두 가지는 해결이 될 것 같은데,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확신이 안 선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배움과 성취를 얻은 때는, 문제 정의부터 해결책 고안, 구현, 검증까지 모든 단계에서 동료와 긴밀하게 얘기하면서 피드백을 주고받고, 때로는 날선 논쟁을 하던 시기였다. 옆에서 일하는 어깨를 톡톡 두드려 불러내서는 (이게 바로 사무실 근무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인 인터럽트다) 종이 한 장 앞에 놓고 앉아서 그림 그려가며 열띤 대화를 나누곤 했다. 두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표정을 읽으면서.

만약 원격으로 일하고 있었다면, 문서나 채팅/화상연결로 과연 그 정도 깊은 수준의 협업이 가능했을까? 각자의 생산성은 올라가지만, 그 합은 옹기종기 모여서 일할 때보다 오히려 작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원격 업무 문화가 성숙하고, 협업을 돕는 기술이 발달하면 해결될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나를 설득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지 벗고 일하면 안 되나요?』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관리자로 일한 경험이 있는 저자가, 갓 팀 제도를 도입한 오토매틱(워드프레스를 만든 회사)에서 팀장을 맡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하며 관찰하고 경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러모로 마이크로소프트와는 반대쪽 극단에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문화에 적응하고, 관리자로서 역할을 스스로 정의하며 팀원들과 협업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오토매틱의 내부 문화가 어떻고, 일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원격 근무가 오토매틱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핵심은 분산화와 상향식 업무 문화에 있다. 상부에서 짠 전략에 따라 직원에서 업무가 할당되지 않는다. 각자가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며, 그걸 실제 서비스에 반영할 권한도 주어진다. 워드프레스의 수레바퀴는 구성원의 열정과 신뢰의 힘으로 굴러가며, 창업자와 CEO, 그리고 회사 시스템(오픈소스, 원격 근무 등)은 에너지가 유지되도록 관리한다.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한계도 있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이슈 티켓 (이슈 추적 시스템에서 말하는 그 이슈 맞다), 계속 추가만 되는 기능으로 일관성과 단순함을 잃어가는 유저 인터페이스 등의 예를 들어가며 중앙관리가 되지 않을 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관리자로서 이런 문제를 중재하거나 장기적인 계획 문화를 회사에 심으려고 애쓴 얘기가 나온다.

팀 멤버 간 정서적인 유대감을 얻기 위해 몇 달에 한 번씩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그렇게 만난 시간에 장기 계획도 짜고), P2라는 워드프레스 사내 업무 공유 시스템의 한계와 부작용을 얘기하는 걸 보면 이 글 서두에서 얘기한 의사소통 문제는 여전히 있는 것 같다. 사실 진짜 궁금한 질문은, 답이 명확하지 않고 창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문제를 개발자들끼리 원격으로 협업하면서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는 거였지만, 이 책에서 시원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알아내야 할 것 같다.

총평하자면, 원격으로 근무하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일하면 어떨지 간접적으로 경험해보고 싶을 때 읽어볼 만한 책이다.

PS. 그냥 재미로 생각해보는데, 평행우주가 있고, 그 세계에서는 매트 뮬렌웨그가 오토매틱 창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격 근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만큼 성공하지 못했을까? 사실 워드프레스는 최초 버전부터가 두 명이 원격 작업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원격 근무가 없었다면 애초에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격은 거의 DNA처럼 새겨진 문화이고, 전세계에서 능력있고 열정있는 사람을 지리적인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고용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장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갖춰놓고 능력있고 열정있고 그리고 거기로 출근할 수 있는 사람만 고용하는 회사를 만들었다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이 질문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