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흥미로운 언어와 사고의 관계 추적사

이스라엘 출신의 언어학자 기 도이처(Guy Deutscher)의 『Through the Language Glass: How Words Colour Your World』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거울로서의 언어”는 언어가 자연과 본능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문화와 관습에 영향을 받는 것인지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 질문이 야기할 전쟁의 격전지로 색깔을 지목하고, 18세기 영국 정치인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저작물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 책의 제목은 『호메로스와 당시 시대 연구』. 글래드스턴은 고대에 쓰인 문헌에서 색깔을 묘사하는 방식이 지금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문장력이라면 현대의 작가들에게 뒤지지 않을 호메로스가 유난히도 색상을 묘하사는 데에는 인색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가끔씩 등장하는 색깔의 비유와 쓰임새가 현재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 검은 와인빛 바다(wine-dark sea)
  • 바이올렛(보랏빛) 털이 두툼한 아름답고 큰 양
  • 초록색 꿀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는 번역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낯선 비유가 끝이 아니다. 호메로스가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파란색이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호메로스의 눈앞에는 파란색을 띤 가장 완벽한 대상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하늘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다. 그의 하늘은 별이 빛나고 광대하고 숭고하고 쇠이고 구리이긴 하지만, 절대 파랗지는 않다., 58p

그로부터 몇 년 뒤 라자루스 가이거라는 유대인 철학자가 고대문헌에서 색깔을 나타내는 어휘를 추적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놀랍게도 색깔 어휘가 문헌에 등장한 순서는 무지개의 색순서와 동일했다고 한다. 즉, 색 스펙트럼에 따라 빨강을 의미하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타나고, 그 뒤에 노랑, 초록, 파랑, 보라에 해당하는 단어가 순서대로 발견된 것이다. 이를 가이거 순서라고 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순서가 전세계 공통적인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글래드스턴의 지적에 이어 가이거의 발견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대인들에게 보인 세상은 우리가 지금 보는 총천연색의 세상과 달리 어두컴컴한 빛깔이었단 말인가? 그러다가 색깔을 인지하는 눈의 해부학적 구조가 진화하면서 다양한 색깔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각 색에 해당하는 어휘도 추가된 것일까?

이런 설명에 순간 혹할 수도 있지만, 진화는 그렇게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으며 후천적으로 습득한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물 교과서의 가르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럼 도대체 이 신기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문화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실제 색깔을 “볼” 수 있다는 사실과 색상에 해당하는 어휘의 존재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고대문헌에서 파란색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하여 우리 조상들이 파란색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며,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할 사회적인 필요나 문화 관습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사고 실험에 나오는 것처럼, 미래 사람들은 현대 인류보다 훨씬 다양한 맛을 즐기게 되고, 그에 따라 맛의 이름을 세세하게 구분해놓았을 것이다. 그들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정말 볼품없는 맛의 어휘를 갖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맛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다시 반론이 나온다. 저토록 뚜렷한 파란색, 노란색을 보면서도 그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문화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색깔을 인식하는 것이 단순히 문화적인 요인이라고 인정한다면, 가이거 순서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색깔 이름이 온전히 문화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름이 탄생하는 순서는 랜덤이어야 할 텐데, 무지개순서를 따른다면 그건 뭔가 규칙이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책을 읽어보면 색상 어휘와 색깔 인식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비유럽인, 즉 다른 대륙의 원주민들을 찾아가 관찰하고 실험한 이야기, 가이거 순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색깔 “초점” 이론 등이 계속 이어진다. 설명이 명료한데다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저자의 글솜씨가 대단해서 읽는 도중에 멈추기가 쉽지 않다.

결론은 저자가 내놓은 “제약 속의 자유”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색깔 인식과 어휘의 문제를 예로 들면, 색깔을 묶는 범주는 인류보편적인 어떤 공통점이 있지만 (ex. 빨강과 파랑을 같은 범주로 묶거나, 노랑과 검정을 같은 범주로 묶는 경우는 없다) 그안에서 얼마나 세분해서 이름을 붙이는지는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정도가 될 것 같다. (어중간해보이지만 사실 많은 진리가 이렇지 않을까) 게다가 그 과정은 좋은 게 좋다는 어설픈 타협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험관찰과 이론에 근거한 선긋기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특정 어휘가 없다고 해서 그 어휘가 나타내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2부 “렌즈로서의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도구인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화두를 다루는데, 미신을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한다. 벤자민 리 워프가 설파한 언어상대주의가 바로 그 척결의 대상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한 위키피디아 문서 참고)

언어상대주의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의 차이를 만든다는 주장이다. 그 언어의 성격과 특성에 따라서 화자는 세상을 다르게 인식할 것이라는 말인데, 아래의 예시를 들어본 사람 많을 것이다.

돌이 땅에 떨어지는 사건을 목격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어없이 이 사건을 두 가지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해야 한다. ‘돌’이라는 대상과 ‘떨어진다’는 움직임이다. (중략) 뱅쿠버에 사는 눗카족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사건을 묘사한다. 눗카말에는 ‘떨어지다’라는 아주 기본적인 동사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중략) 대신 돌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돌’이라는 말에 특별한 성분을 붙인다. 그래서 우리가 ‘돌’과 ‘떨어진다’로 구분하는 사건의 상태를 눗카어는 ‘돌 아래로’와 같이 묘사한다.

저자는 워프의 언어상대주의를 맹렬하게 공격(이라고 하기도 사실은 좀 뭣하다. 언어학에서는 이미 폐기된 이론이라고 하니)한다. 그의 부실한 연구조사를 지적하고, 또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언어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에 정말로 영향을 끼치는지 묻는다. 1부에서 특정색을 뜻하는 단어가 없다고 그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아님을 여러번 반복주장했었다. 눗카족이 그들의 모국어 때문에 대상과 움직임을 구분하지 못할까? 만약 그렇다면, 주체와 동작을 구분해서 “비가 내린다”고 하는 한국어 화자와 둘을 섞어서 “It rains”라고 하는 영어 화자 또한 동일한 현상을 다르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밝히면 조금 당황스럽다. “모국어가 우리 생각과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이 어떤 측면에서 의미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언어상대주의 비판하다가 이게 뭐야 싶지만 차근히 따라가다 보면 그럴듯한 가정과 실험에 근거한 주장으로서 무척 설득력있게 들린다. 그 가정이라는 것은 로만 야콥슨이 주창한 아래의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언어는 언어가 ‘전달할 수 있는’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달해야 하는 부분’에서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영어는 항상 시점(현재, 과거, 미래 등)을 명확하게 표현하도록 강요하는데 반해 중국어에서는 행동이 일어나는 시간을 표시할 의무가 없다. 아마존의 마체족 언어에서는 더 세분하여 과거시제를 한달 이내 / 50년 이내 / 50년 이상으로 구분하고, 사실을 알게된 경로를 직접 경험 / 증거에서 추론 / 짐작 / 전해들은 것으로 구분해서 말하도록 요구한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모국어가 무엇이건 간에 인식할 수 있는 대상에는 차이가 없으며, 표현할 수 있는 범위에도 제한이 없다. 하지만, 저런 문법적인 강요가 있다면 그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가령 마체족의 언어를 쓰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모든 사실을 경험 / 추론 / 짐작 / 전해들은 것으로 분류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사고하지 않을까?

충분히 해봄직한 생각이지만, 워프의 지난 과오를 잘 아는 저자는 쉽게 그런 주장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여러 사례와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실험 결과를 제시하면서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려 노력한다. 그가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구구이미티르족의 언어다. 이 종족은 우리처럼 “오른쪽 왼쪽”이란 단어로 방향을 나타내지 않고, 대신 “동서남북” 좌표계를 사용한다고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 “서쪽 발 아래”
  • “이제 북쪽 손을 들고 동쪽으로 세 발짝 움직이세요”

방위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도 나름 정확하게 방향을 얘기했다는데, (방향치인 나로서는) 믿기 힘든 이런 능력은 항상 절대방위를 얘기하도록 강요하는 언어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이런 언어를 쓰는 구구이미티르족 사람들은 우리 오른쪽왼쪽 사람들과 세상을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처음의 색깔 인식 문제로 돌아가서, 좀더 세분화된 색깔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두 색의 차이를 인식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사물에 성별을 부여하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그 언어적 습관으로 인해 연상력에 영향을 받지 않을까? 이런 궁금증을 가질 독자들을 위해서 저자는 기발한 실험을 준비해 두었으니 결과는 직접 책에서 확인해보도록 하자.

여태까지 비문학 서적에 대한 독후감을 쓰면서 스포일러 걱정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 이글을 쓰는 동안에는 몇 번이나 이 얘기를 써도 되나 고민했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추리소설 버금가게 흥미진진한 책이라 예비독자의 즐거움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미 뿐만 아니라 남는 내용도 많은 책이라서 다 읽고 나면 분명 내가 쓰는 언어(모국어)와 나의 사고의 관계에 대해서 한 번 정도는 깊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강력 추천.

노란 형광펜

  • “모호한 단어로 바다를 묘사했다는 이유만으로 음유시인의 색깔인식기관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 비평가에게 시적감성기관에 결함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54p (합리적인 의문 제기에 이렇게 비꼬기로만 대응한다면 건설적인 토론이나 발전은 있을 수 없겠지.)
  • 보아스도 야콥슨도 그러한 문법적 차이로 인해 언어가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중략) 그럼에도 내가 보기에 보아스-야콥슨원리는 특정한 언어가 생각에 미치는 실제 영향을 밝혀내기 위한 열쇠이다., 223p
  • 하지만 이 책을 읽을 자손들이여. 우리 앞에 지나간 무지한 선조들을 우리가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무지를 용서하시라. 유전의 신비는 이제 모두 풀렸지만,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긴 세월, 어둠속에서 길을 찾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 저 꼭대기 위에서 우리를 안타깝게 내려다 볼 후손들이여. 우리 노력이 없었다면 자네들도 그곳에 서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해의 빛이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날 때까지 우리가 어둠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물론 고마워할 필요도 없겠지. 우리가 그런 안락한 유혹에 넘어간다면 자네들, 후손들의 왕국은 어차피 오지 않을 것이니., 338 ~ 339p (저자의 에필로그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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